생활지원사가 안부 확인차 한 어르신 댁을 찾았습니다. 식사는 잘하셨는지, 밤에 잠은 좀 주무셨는지 여쭙고 동네 이야기, 날씨 이야기를 한참 나눴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어르신이 휴대폰을 내미셨습니다. "이거 뭐라고 왔는지 좀 봐줘."
문자를 읽어 드리자 어르신은 서랍에서 꼬깃꼬깃 접힌 고지서 두어 장을 꺼내 오셨습니다. 방문 내내 이어진 이야기는 이 부탁을 꺼내시기까지의 뜸이었던 셈입니다. 처음 몇 번은 이 한마디를 끝내 못 하시고 배웅만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얼굴이 익고 마음이 놓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현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모아 두신 고지서부터 내미시는 분도 계십니다.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숨겨온 세대
지금 80대이신 분들은 대개 1940년대 전후에 태어나 보릿고개를 지낸 분들입니다. 학교는 형편이 좀 나은 집 아이들 차지였습니다. 여성분들은 딸이 글 배워 어디 쓰느냐는 소리를 들으며 남동생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낮에는 남의 집 농사일을, 밤에는 호롱불 아래 바느질 품을 팔았습니다. 남성분들 중에도 책가방 대신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른 분이 적지 않습니다. 살면서 눈동냥으로 글을 깨친 분도 계시지만, 종이 위 글자가 여전히 그림으로만 보이는 분들이 우리 동네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2021년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를 보면,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읽기·쓰기·셈하기가 어려운 성인(수준 1)은 전체의 약 4.5%,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80대 이상으로 좁히면 중학 수준에 못 미치는 문해력(수준 1~3) 비율이 약 77%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어르신들은 안경을 두고 왔다, 눈이 침침하다는 핑계로 자식들 앞에서까지 평생을 넘겨 오셨습니다.
동의서를 내밀면 문을 닫으시던 어르신
비문해는 사례관리 첫 방문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입니다. 욕구사정 서류와 동의서를 꺼내는 순간 표정이 굳으면서 다음에 오라며 문을 닫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저희도 처음엔 성격이 까다로우신 분인가 했습니다. 몇 달을 드나들고 나서야 이름 석 자를 못 쓰시는 게 들킬까 봐 그러셨다는 걸 알게 된 경우가 여러 차례입니다.
그래서 저희 사회복지사와 생활지원사들은 한글을 아시느냐고 먼저 묻지 않습니다. 가정방문에서 가장 많이 해 드리는 일도 휴대폰 문자를 읽어 드리고 우편함에 쌓인 고지서를 확인해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문자가 왔는지, 이번 달 요금이 얼마 나왔는지 소리 내어 읽어 드리고, 서명할 칸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짚어 드립니다. 현장에서는 이걸 모른 척해 드린다고들 합니다. 다만 어르신들은 문자 한 통, 고지서 한 장이 올 때마다 생활지원사의 다음 방문 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은빛 한글 배움 교실 운영 개요
내부 회의 끝에 한글을 전혀 모르시는 80대 재가 어르신을 모아 교실을 열기로 했습니다. 강사는 은퇴하신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재능기부로 맡아 주셨습니다.
| 구분 | 내용 |
| 대상 | 한글을 전혀 모르는 80대 재가 어르신 10명 |
| 강사 | 은퇴 초등학교 교장(재능기부 연계) |
| 기간 | 주 2회, 회당 2시간 : 총 30차시(약 4개월) |
| 장소 | 기관 2층 소강당 |
| 목표 | 이름 석 자 쓰기 손주에게 편지 쓰기 키오스크 주문 단어 익히기 |
| 지원 | 특대형 맞춤 교재(가정방문 시 숙제 점검) |
열 명 중 세 명이 끝까지 남기까지
교실 준비보다 어르신을 교실까지 모셔 오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사회복지사들이 한 달 가까이 집집이 다니며 권했지만,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 남사스럽다며 손을 내젓는 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손주 카톡에 답장 한 줄은 직접 써 보셔야지 않겠느냐, 키오스크로 손주 아이스크림 한번 사 주시라는 말에 한 분, 두 분 마음을 여셨습니다.
첫 수업 날 농사일과 바느질로 마디가 굵어진 손들이 연필을 쥐었습니다.
ㄱ, ㄴ, ㄷ을 따라 쓰실 때만 해도 교실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두 달쯤 지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글자는 돌아서면 잊히고, 노안과 백내장 때문에 큰 글씨 교재도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관절이 아파 숙제를 오래 붙들고 있으면 손이 떨렸습니다. 내가 머리가 나빠 폐만 끼친다며 한 분씩 결석이 잦아졌습니다.
넉 달 뒤 수료식 단상에 오르신 분은 세 명이었습니다.
그중 한 어르신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외손자에게 처음 쓴 편지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으셨습니다.
"민우야, 할머니가 글자를 몰라 그동안 동화책 한 번 못 읽어줘서 미안했다. 할머니 이제 민우한테 편지도 쓸 줄 안다. 학교 잘 다니고 아프지 마라."
받침이 절반쯤 틀린 편지였는데, 다 읽기도 전에 강사 선생님도 사회복지사들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 어르신은 요즘 주민센터 서명란에 본인 이름을 직접 적으십니다. 은행 창구에서도 이제는 서류부터 달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2기 교실에서 바꿔 보려는 것
중간에 그만두신 일곱 분도 한동안은 누구보다 열심이셨습니다. 그분들이 발길을 끊게 된 사정을 되짚어 보면, 손 통증을 참아 가며 숙제로 글씨를 쓰시는 게 가장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2기는 쓰기 분량을 줄이고 소리 내어 읽기와 따라 말하기 시간을 늘리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결석이 이어지면 담당 사회복지사가 가정방문 때 진도를 함께 짚어 드리고, 더 배우고 싶어 하시는 분은 지역의 학력인정 문해교육 과정으로 연계할 계획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어르신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공공 프로그램이 있나요?
A. 지자체 평생학습관과 복지관 등에서 성인문해교육을 운영합니다.
이 가운데 시·도교육감이 지정한 기관의 학력인정 문해교육 프로그램은 평생교육법 제40조에 근거해, 과정을 이수하면 초등 또는 중학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2026년 기준 만 18세 이상이면 참여할 수 있고 초등과정은 3단계로 운영됩니다. 거주지 시·군·구청이나 평생학습관에 문의해 보세요.
Q2. 기관 사례를 블로그나 홍보물에 쓸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요?
A. 당사자 동의 없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하면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소지가 있습니다. 이름은 가명으로 바꾸고 거주지나 가족관계처럼 특정 가능한 정보는 빼야 합니다. 손편지나 사진은 서면 동의를 받은 뒤 사용하세요.
복지인저널 생각노트
한글교실을 열기 전까지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문자와 고지서를 대신 읽어 드리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수료하신 세 분은 이제 주민센터와 은행 일을 직접 보십니다. 이번 교실에서 저희가 가장 반가웠던 변화입니다.
▶ 참고 : 교육부·국가평생교육진흥원,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2021년 발표)
▶ 본 글은 서울 강서구 재가노인복지기관의 한글교실 프로그램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by 복지인 조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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